Wednesday, November 30, 2011
끝과 시작에
-그도그럴것이 그동안 일 끝나고 집에오면 쓰러져서 자는 나날들의 연속, 일주일에 컴퓨터는 회사 인트라넷이 전부였다. 자연스레 블로그와 단절, 외국에 거주하는 친구들과의 연락도 두절.
-많은 일들이 있어서, 너무 많은 감정이 있어서 생각하기 싫어 덮어놓는 나날들. 매일 밤 악몽을 꾸다 새벽에 깨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시간들. 자다깨다 얕은 잠 자다가 눈 비비며 새벽 지하철을 타던 그때. 지하철에 웃는 사람이 하나 없고, 다들 어떻게 하루하루를 견디나요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던 하루하루. 길을 걷다보면 이유없이 눈물이 핑 돌고. 따뜻한 한 마디에 눈물만 주루룩하던 순간들. 내가 이렇게 눈물이 많았었나 싶을 정도로 많이도 펑펑거리던 그때. 나만 모자른 걸까, 사람들은 잘 하고 있는데 나만 이러는 걸까. 내가 약한 걸까. 쓸모 없는걸까 고민만 하다 퇴근길에 본 거울 속 내 무기력한 얼굴. 잠깐 본 남친님에 방긋하던 한 시간 가량의 퇴근 길이 끝나고 나면 집에서 '엄마 다녀왔습니다'하고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이유 없이 또 눈물만 흘러내린 밤. 지울 수 있다면 2011년의 내 삶이 지워졌으면 손꼽았던 매일들.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고 힘든걸 자꾸 괜찮다 괜찮다 웃고 또 웃으니 마음은 더 힘들고 병들었던 것 같다. 무엇을 위해 부여잡고 있었는지 날 괴롭히던 인내라는 이름을 쓴 녀석도 점점 지쳐만 갔고. 매일 아버지들의 삶에 고개가 숙여졌다.
-꿈도 하고픈 것도 아직 없다. 이제는 마음이 편해지고 많이 놓았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예전에 품어왔던 이상과 꿈들이 현실과 맞닿으면서 한계를 알아가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놓아서 마음이 편하다고 할까. 꿈이 가득하던 그 때보다 이제는 하루하루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에 몸이 편하고 마음이 편하고프다. 예전에 내가 제일 혐오하던 삶을 이제 내가 가장 바라고 있다니. 참 인생이 돌고 돈다는게 이런건가.
-회사를 그만뒀다. 나오면서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나오자,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무리하자. 라고 마음 먹어서 정신없는 퇴사가 되어버렸지만. 회사를 그만두면서 가장 망설였던 부분은 사람이었다. 누군가 내게 순진하다 말할지 모르겠지만, 첫 직장에서 나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마주했다. 그만두고 나서도 이런 사람들을 또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앞섰다고나 할까.
-인복이 많다는 건 사실 같다. 첫 사회생활로 만난 선배, 상사들에게 너무나 감사하다. 내가 송별회에서 눈물을 연신 훔치며 한 사람 한사람에게 했던 말에, 내 마음을 모두 표현하지 못해 아쉽기만하다. 아직까지. 나를 위해 눈물 흘려주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감사하다.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았고, 그리고 그들이 나의 인생의 한 챕터를 따뜻하게 장식해 주었다는데 고맙다. 힘들었던 기억들이 결국 뒤돌아보면 추억이 되는덴 '사람'이라는 힘 때문인 것 같다.
-끝과 시작에 서있다. 예전 같으면 시작에 설렘 기대들이 많으리라. 근데 지금은 솔직히 많이 두렵기도하고, 어떤 어려움이 찾아올까 무섭기도 하다. 끝과 시작에 서있는 내가 또 어떤걸 느끼고 생각할지 궁금하다. 그냥 잘 견뎠으면 좋겠다.
-다만, 내가 선택한 '끝'에서 또다른 '시작'을 만들어낼때, 적어도 '끝'에 대한 후회가 없었으면 한다. 내 선택을 믿고 응원하는 내가 되기를.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
Sunday, May 15, 2011
단상 몇가지
결론은 집에서 곰이 겨울잠 자는 것처럼 지내고 말았다. 피로 누적의 끝은 결국 잠인가.
++아침 출근길 오전 7시 차를 타면, 지하철에 못 앉게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서서 앉은 사람들 얼굴을 관찰하곤 한다. 표정을 살피다 드는 생각은 "다들 뭘 위해 사는가"이다. 무표정과 무료함의 정점을 찍은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지하철 창에 비친 내 얼굴도 슬쩍 본다. 난 달라야만해 라는 생각으로 씨익 웃어보았다. 뭐 크게 다르진 않았다.
+++덜 컸다. 내가 이렇게 어린 사람이었나. 어린 생각을 아직도 갖고 있나. 철이 없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요즘이다. 어른들은 어떻게 어른처럼 생각하지. 마음먹지. 라는 의문이 든다. 어른인 척 생각하고 어른처럼 행동하는건가. (사실 나도 나이로는 어른이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창 밖에 사람들을 문득 쳐다보면, 갑자기 신기해진다. 지나가는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사연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는게 신기하다. 평범하면 평범한대로, 그렇지 않은대로 모두 다른 이야기를 쓰고 살아가는 걸 보면 신기하다. 걸어다니는 사람들마다 머리 위에 자서전 하나를 이고 가는 것 같다. 그러다가 서로 마주치거나, 이야기를 섞거나, 친구가 되어 우정을 하거나, 연인으로 사랑을 하거나, 그러다 웃거나 슬프거나 헤어지거나 그런 과정들. 결국 각자의 인생챕터에 그렇게 엮인 서로의 이야기가 써지는게 신기하다. 나는 누군가의 인생에 잠깐의 주연일 수도, 조연일 수도, 아니면 지나가는 엑스트라로 잠깐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런게 참 신기하다.
++++.+ 결국 내 인생의 이야기는 내 손으로만 쓰여지지 않는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서로의 인생을 쓰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서로의 이야기를 쓰는게 그런게 내 삶이고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인연을 소중히 할 수밖에 없다. 내 이야기를 써주는 그들이고, 나 또한 그들의 삶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돌이켜 보면 날 변화 시키고 성장시킨 것도 내 힘만은 아니었다.
++++.++ 이야기가 길어지네.
+++++
Saturday, May 7, 2011
Wednesday, April 13, 2011
가장
넘실넘실거리지 않았음 좋겠다. 마음도 컨디션도 기분도 말이다.
출렁출렁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그런 마음을 언제쯤 가질 수 있을까 싶다.
보고싶은 사람도, 가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늘고 있다.
신기하게도 백수때는 그런게 하나도 생각 안나더니, 사람 마음이 간사하지 지금에서야;
더불어 해야 하는 것들도 늘고 있다.
마음이 꽉 차서 그냥 스스로 잘 믿어줬음 좋겠다.
마음에 구멍이 있으면 그게 그냥 내뿜는 숨으로라도 채워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누구보다 나를 잘 믿어줄 수 있을까.
요즘 느끼는거지만, 인간은 불안함 위에서 살아가는 것 같다.
불안함이 앞으로 나아갈 구석을 만들어 준 것 같기도하다.
그래서 과거 현재가 있고, 불안한 미래도 있고. 시간이란게 그래서 있는가보다.
불안해서 꿈을 꾸기도 하고, 불안해서 꿈을 포기하기도하고,
꿈을 이루고서도 다음이 불안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좋게 생각하면 그게 멈추지 않는 삶을 만들기도 하고, 그냥 보통 시각에서 보면 골치 아프기도 하다.
숨가쁘기도하고.
뭐 사람에 따라서는 다르겠지만, 불안이란 감정이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걸 만들고 또 만들게 하는 촉매제 역할인 것 같기도.
아무튼 오랜만에 블로그에 왔다.
Friday, February 18, 2011
술김에
그륀 신부님이 그랬다. "삶에선 하나를 선택하면, 늘 하나를 놓치게 된다. 그걸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놓친 것에 대해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선택한 삶에 대해 정말 감사하며 살 수 있다."
딱 1년을 끝으로 내 구직 생활은 일단 끝이 났다. 일년간 나는 포기해야할 것은 과감히 그러해야하고, 마음을 비워야할 것은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일단 마음은 시원하다. 한결 가볍다. 그동안 짓누르던 불안감에서 해방되니 일단은 기쁘다. 어느 일이야 힘들지 않고, 힘겹지 않을까. 일단 들어선 길이니 여기서 최선을 하고 싶다. 최선을 다하다보면 꿈은 또 생길 수도 있으니깐 말이다.
한편으론 아쉽다. 위의 말처럼 두고온 한 길에 대해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 슬퍼하고 싶다. 지난 시간 동안 꿈을 꿔왔던 내 시간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지원동기 하나 제대로 써내려가지 못할 정도로 글로도 말로도 잘 표현하지 못한 가슴만 무작정 벅찼던 그 꿈이 참 아쉽다. 중고등대학교 시절 오래도록 그려왔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꿈을 그려온 만큼 그만한 노력을 쏟지 않았기에 정직한 눈물은 흘리지 못하겠다.
예전엔 불안이나 걱정 등을 블로그나 일기에 남기는게 참 궁상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나고나니 그 모든 감정들이 남겨둘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기억 속에 좋은 것만 남겨두려는 인간의 습성 때문인지 불안한 그 때, 생각 하나하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또다시 이런 시기가 찾아오면 나는 그 때를 다시 펴보고 위로삼고 싶은데 말이다.
ㅅㅇ와 ㅈㅇ오빠와 간만에 만났다. 대학 시절 사람들을 만나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많이 위로가 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내가 가지 못한 길에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그동안 그냥 괜찮다고 더 좋은 길이 있을거라고 달래만 왔는데, 그것만 답이 아닌 것같다. 충분히 슬퍼해도 된다. 아쉬워해도 된다. 그래도 된다. 그걸 자꾸 피해왔다. 합리화로 변명으로, 혹은 합리화도 변명도 아닌 정말 진심일지라도. 그게 무엇이든 피하지 말고 슬퍼하고 또 아쉬워하자. 새로운 길에 들어서기 전까진 괜찮다.
술김에 쓰더라도 내일 일어나서 지우지 말자하고 써본다. 아무튼 이제부턴 새벽에 글쓰기도 힘들테니 좀 아쉽다.
1. 이제 안되겠다 싶을때, 거의 외우다시피 한 글은 이전에도 올린 김미화씨 트윗의 한 구절이었다. 다시 올려본다.
kimmiwha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8:00 AM Nov 4th, 2010 via twtkr
2. 이동진 기자의 이 글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했던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시네마 레터]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꿈'
2001년 12월 02일 20:59
깨어진 꿈은 상처를 남기고 이뤄진 꿈은 숨막히게 해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슬픔이 얼마나 전염성 강한지를 일러주는 영화입니다. 이 작품은 ‘와이키키 브라더스’라는 3류 밴드가 무대를 찾아 부초처럼 떠도는 이야기를 폭음 뒤 위(위)로부터 역류해 올라오는 산(산)처럼 쓰디쓰게 토해냅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룸살롱에서 혼자 반주하던 성우가 취객 요구로 옷을 모두 벗은 채 처연하게 기타 치는 광경을 가장 마음 아픈 장면으로 꼽곤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저릿했던 부분은 어린 시절 함께 록밴드의 꿈을 키웠던 공무원 친구 수철이 성우에게 이런 말을 건넬 때였습니다. “성우야, 행복하지? 그래도 좋아하는 음악하면서 사니까 행복하겠지. 우리 중에 하고싶었던 것 하는 놈, 너밖에 없잖아.”
꿈의 비극은 그것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음을 전제 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꿈이란 태양과 같아서, 정면으로 응시하면 눈멀고 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깨어진 꿈의 조각은 상처를 남기지만, 이뤄진 꿈의 무게는 우릴 질식하게 만듭니다. 그리스 신화 속 이카루스는 더 높이 날기를 꿈꾸었기에 추락했고, 벨레로폰은 페가수스를 타고 올림푸스로 가길 꿈꾸었기에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최후를 맞았지요. 인도 감독 부다뎁 다스굽타의 ‘레슬러’에서 결국 참극을 겪게 되는 우타라는 “꿈은 오히려 삶을 단축시킬 뿐”이란 삼촌 이야기를 전했던가요.
실현된 꿈은 결과적으로 더 이상 꿈이 없게 된 현실을 더 아프게 받아들이게 하는 요인일 수 있습니다. 성우가 어린 시절에 맹연습했던 송골매의 록음악 ‘세상만사’와 음악 따위엔 아무 관심 없이 끌어안고 춤추는 취객들을 위해 연주하는 심수봉의 트로트곡 ‘사랑 밖엔 난 몰라’ 사이보다 훨씬 더 먼 거리가 꿈의 안팎에 놓여 있는 지도 모르지요.
꿈을 꿀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이지만, 성취된 꿈은 수많은 ‘어떻게’의 질문을 연쇄적으로 양산하면서 결국 그 성취를 초라하게 만듭니다. ‘모든 한정(한정)은 부정(부정)”이라고 한 스피노자의 발언은 이제 막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정확히 들어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들은 꿈의 내용을 제한할 어떤 부수 조건도 생각지 않은 채 하나의 큰 덩어리로 꿈을 꾸지요. 창고에서 친구들과 연주에 몰두하던 10대 시절의 성우가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5주 연속 1위 하는 대히트곡을 3곡 이상 남기겠다”거나 “매달 적어도 200만원 이상을 벌어들일 수 있는 음악인이 되겠다”는 식으로 꿈꾸진 않았겠지요.
그 꿈은 그저 “음악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이뤄진 현실로서의 꿈은 이제 그 수많은 제한 조건들을 열어보이며 그를 좌절케 합니다. 꿈에 포함될 수 없는 한정이 현실에는 너무도 많기 때문이지요. 꿈은 실험실 플라스크 속 진공 같아서 순수하지만, 그 꿈은 현실이란 대기와 만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오염되게 마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뤄지기 어려운 꿈을 꾸는 이유는, 그리고 대개의 꿈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인간에게 눈 둘 곳을 남겨두게 하면서 권태에 직면하지 않게 예비하려는 섭리 덕분인지도 모릅니다.
이동진
http://cinema.chosun.com/site/data/html_dir/2001/12/02/20011202000004.html
Saturday, February 12, 2011
배경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에 혼자 싱가포르에 있었던 저는, 보트키에 있는 재즈바에 들어갔습니다. 적당한 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연말을 즐기기도 했고, 몇몇은 커플끼리 다정하게 앉아있었죠. 그 가운데에서 혼자 창 옆에 앉아 깔짝 깔짝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는데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 때 그 기억이 너무 좋아서 싱가포르에 가는 사람마다 추천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2010년에 다시 찾았을 때 이곳은 쌩뚱맞게 피트니스 센터로 변해있었습니다.;; 이리도 안타까울수가.
Monday, January 31, 2011
하루라도
하루라도 그냥 지금만 생각했음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해봤다.
미래에 대한 기대나 걱정이나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지금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 말이다.
영화를 보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걷거나 누워 있거나 샤워를 하거나 밥을 먹거나 등등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그것만 하고 있고, 생각하고 싶다.
그땐 미래에 대한 고민이 침투하지 못하게 차단해버리고 싶다.
뇌 안에 셔터가 있다면 스르륵 딴 생각이 침투할 때 가차없이 내려버리고 싶은 적이 있다.
그게 분홍빛 꿈일지라도 말이다. 꿈은 자연스레 미래에 대한 기대와 근심을 동반하기 때문에 생각이, 마음이 복잡해지곤 한다. 가치있는 고민인줄은 알지만 가끔 생각에 생각을 무는 그 과정이 버거울 때도 있는 것 같다. 예전엔 버겁지만 해야한다는 의무감 같은게 있었는데, 요즘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고민은 언제나 고민으로 끝날 확률이 높고->그건 자연스레 스트레스로 직결-> 결국은 지금 현재마저 도랑에 던져 버리는 실수를 범함->나중에 후회의 그럴싸한 근거가 됨
이라는 프로세스에 대한 기회비용이 너무나 크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공상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나'라는 아이는, 매몰차게 뇌의 셔터를 내리지 못한다는 걸 안다; (아마 불가능일지도 모름)
가끔 눈을 감고 3분 정도 아무 생각없이 있어보려하는데, 이게 쉬운게 아니다.
입을 닫고 눈을 감고 있으면, 내 머리가 내 마음이 그렇게 수다스러울 수가 없다. 시끄러울 정도이다.
생각 버리기 연습에 관한 책이 붐이 일고 있는게 괜히 그런게 아니다.
(John Mayer 'No such thing', 최근 기타 연주에 대한 배움의 욕구를 또 한번 자극한 노래. 존메이어 꽤 오래 안 듣다가 요즘 이 노래 때문에 다시 홀릭 중.)
Thursday, January 27, 2011
Friday, January 14, 2011
Sunday, January 9, 2011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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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동진의 시네마레터’라는 칼럼을 10년 넘게 써왔습니다.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하는 상황에서, 예전에 썼던 수백편의 시네마레터들 중 독자들의 호응이 가장 컸던 글 다섯 편을 이곳에 올립니다. 새로 쓰게 될 시네마레터 칼럼은 앞으로 계속 이곳에 실릴 예정입니다.)
중세 독일의 전설에 이런 게 있지요. 독일 바덴 지방의 어느 젊은 백작이 덴마크를 여행하다가 아름다운 성의 정원에서 오라뮨데 백작 부인을 보고 한 눈에 반합니다. 그는 그 성에 머물면서, 남편을 잃고 아이들과 살아가던 오라뮨데 백작 부인과 깊은 사랑을 나눕니다.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을 때 그는 “네 개의 눈이 있는 한 당신을 바덴으로 데려갈 수 없다오. 네 개의 눈이 사라지면 반드시 당신을 데리러 오겠소”라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네 개의 눈이란 자신의 부모를 뜻하는 말이었지요.
집으로 돌아간 그는 반대할 줄 알았던 부모로부터 수개월 뒤 의외로 쉽게 허락을 받자 기쁨에 들떠 덴마크로 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오라뮨데 백작 부인이 아이들을 살해한 뒤 죄의식에 몸져 누운 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백작 부인은 ‘네 개의 눈’이 새로운 사랑에 방해가 되는 자신의 아이들인 걸로 오해해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거지요. 자초지종을 알게 된 독일 백작은 말을 타고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백작 부인의 그 처참한 사랑으로부터 말입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대학생 츠네오가 다리를 쓰지 못해 집에만 틀어박힌 조제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판자촌에서 살아가는 장애인 조제와 사랑을 나누다가 서로 다른 처지 때문에 헤어지게 된 츠네오는 조제의 할머니가 죽자 이를 계기로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 함께 삽니다.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에게 소개시키기 위해 조제와 자동차를 타고 떠난 츠네오는 도중에 마음을 바꿔 갈 수 없게 됐다고 고향에 전화를 합니다. 전화를 받던 동생은 “형, 지쳤어?”라고 되묻지요.
그 여행 후 결국 츠네오는 조제와 헤어집니다. 영화 속 이별의 순간은 의외로 너무나 깔끔합니다. 조제는 담담히 떠나 보내고, 츠네오는 별다른 위로의 말 없이 그냥 일상적인 출근이라도 하는 듯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섭니다.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옛 여자친구는 그를 만나자마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합니다. 묵묵히 들으며 함께 걷던 츠네오는 갑자기 무릎을 꺾고 길가의 가드 레일을 잡은 채 통곡합니다. 그 순간 츠네오의 독백이 낮게 깔립니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유는 여러가지 댈 수 있지만, 사실은 단 하나 뿐이었다. 내가 도망쳤다.”
결국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우리가 도망쳐 떠나온 모든 것에 바치는 영화입니다. 한 때는 삶을 바쳐 지켜내리라 결심했지만, 결국은 허겁지겁 달아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처참한 결말을 논외로 한 채 사랑 자체의 강렬함만으로 따지면, 오라뮨데 백작 부인 만큼 온 몸을 던지는 사람도 없겠지요. 정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조제만큼 절박하게 사랑이 필요한 경우도 드물 거고요. 공포 때문일 수도 있고 권태나 이기심 탓일 수도 있겠지요. 동생이 되물었듯, 츠네오는 그저 지쳤던 것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떠나갑니다.
모든 이별의 이유는 사실 핑계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긴, 사랑 자체가 홀로 버텨내야 할 생의 고독을 이기지 못해 도망치는 데서 비롯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게 어디 사랑에만 해당되는 문제일까요. 도망쳐야 했던 것은 어느 시절 웅대한 포부로 품었던 이상일 수도 있고, 세월이 부과하는 책임일 수도 있으며, 격렬하게 타올랐던 감정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결국 번번이 도주함으로써 무거운 짐을 벗어냅니다. 그리고 항해는 오래오래 계속됩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들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길. 이 아름다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깨끗하게 묶은 조제의 뒷모습처럼, 결국엔 우리가 두고 떠날 수 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진 않기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63&aid=0000000010
Friday, January 7, 2011
Sunday, January 2, 2011
새해
새삼스레 이 노래가 왜이리 와닿는지.
고등학교 때 나왔던가, 중학교 때 나왔던가. 그땐 잘 알지 못했던 가사가 이제 조금은 알겠다.
무수히 많은 날 중에 이름만 다르게 붙인듯한 새해의 시작.
새해, 명절 등등의 분위기를 잘 타지 않지만,
이례적으로 저번해는 유난히 호들갑을 떨었고,
이번해는 이만치 무던하게 시작하는건 또 없었던 것 같다.
2010년 12월 31일에서 그냥 12월 32일.. 이렇게 지나는 느낌이다.
아무튼 새해 계획이 뭐냐는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고 있다.
예전같으면 무엇을 하겠다. 배우겠다. 가겠다. 이루겠다. 만나겠다. 하고싶다. 등등이 많았는데
신기하게도 이번 해의 시작에는 그런게 잘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계획이기보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새해에는 겸손한 사람이고 싶다.
겸손이라는게 능력인가 싶을 정도로 겸손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
겸손하던 사람이 쉽게 변해 버리기도하고.
사회에 물들어 간다는 것은 겸손을 잃어간다는 말로 대체해도 될 정도로. 많이들 변해간다.
아직 사회에 발을 담그지 않은 나부터도 그렇고.
사회적 위치, 나이 등을 막론하고 겸손한 사람을 찾기 힘들기에 이제 겸손은 미덕을 넘어 능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에서 제일 지키키 힘든 가치이자,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존경받을 만한 가치.
아무튼 요지는 새해엔 겸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