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February 18, 2011

술김에



그륀 신부님이 그랬다. "삶에선 하나를 선택하면, 늘 하나를 놓치게 된다. 그걸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놓친 것에 대해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선택한 삶에 대해 정말 감사하며 살 수 있다."

딱 1년을 끝으로 내 구직 생활은 일단 끝이 났다. 일년간 나는 포기해야할 것은 과감히 그러해야하고, 마음을 비워야할 것은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일단 마음은 시원하다. 한결 가볍다. 그동안 짓누르던 불안감에서 해방되니 일단은 기쁘다. 어느 일이야 힘들지 않고, 힘겹지 않을까. 일단 들어선 길이니 여기서 최선을 하고 싶다. 최선을 다하다보면 꿈은 또 생길 수도 있으니깐 말이다.

한편으론 아쉽다. 위의 말처럼 두고온 한 길에 대해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 슬퍼하고 싶다. 지난 시간 동안 꿈을 꿔왔던 내 시간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지원동기 하나 제대로 써내려가지 못할 정도로 글로도 말로도 잘 표현하지 못한 가슴만 무작정 벅찼던 그 꿈이 참 아쉽다. 중고등대학교 시절 오래도록 그려왔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꿈을 그려온 만큼 그만한 노력을 쏟지 않았기에 정직한 눈물은 흘리지 못하겠다.

예전엔 불안이나 걱정 등을 블로그나 일기에 남기는게 참 궁상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나고나니 그 모든 감정들이 남겨둘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기억 속에 좋은 것만 남겨두려는 인간의 습성 때문인지 불안한 그 때, 생각 하나하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또다시 이런 시기가 찾아오면 나는 그 때를 다시 펴보고 위로삼고 싶은데 말이다.

ㅅㅇ와 ㅈㅇ오빠와 간만에 만났다. 대학 시절 사람들을 만나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많이 위로가 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내가 가지 못한 길에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그동안 그냥 괜찮다고 더 좋은 길이 있을거라고 달래만 왔는데, 그것만 답이 아닌 것같다. 충분히 슬퍼해도 된다. 아쉬워해도 된다. 그래도 된다. 그걸 자꾸 피해왔다. 합리화로 변명으로, 혹은 합리화도 변명도 아닌 정말 진심일지라도. 그게 무엇이든 피하지 말고 슬퍼하고 또 아쉬워하자. 새로운 길에 들어서기 전까진 괜찮다.

술김에 쓰더라도 내일 일어나서 지우지 말자하고 써본다. 아무튼 이제부턴 새벽에 글쓰기도 힘들테니 좀 아쉽다.


1. 이제 안되겠다 싶을때, 거의 외우다시피 한 글은 이전에도 올린 김미화씨 트윗의 한 구절이었다. 다시 올려본다.

kimmiwha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via twtkr

2. 이동진 기자의 이 글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했던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시네마 레터]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꿈'

2001년 12월 02일 20:59

깨어진 꿈은 상처를 남기고 이뤄진 꿈은 숨막히게 해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슬픔이 얼마나 전염성 강한지를 일러주는 영화입니다. 이 작품은 ‘와이키키 브라더스’라는 3류 밴드가 무대를 찾아 부초처럼 떠도는 이야기를 폭음 뒤 위(위)로부터 역류해 올라오는 산(산)처럼 쓰디쓰게 토해냅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룸살롱에서 혼자 반주하던 성우가 취객 요구로 옷을 모두 벗은 채 처연하게 기타 치는 광경을 가장 마음 아픈 장면으로 꼽곤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저릿했던 부분은 어린 시절 함께 록밴드의 꿈을 키웠던 공무원 친구 수철이 성우에게 이런 말을 건넬 때였습니다. “성우야, 행복하지? 그래도 좋아하는 음악하면서 사니까 행복하겠지. 우리 중에 하고싶었던 것 하는 놈, 너밖에 없잖아.”


꿈의 비극은 그것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음을 전제 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꿈이란 태양과 같아서, 정면으로 응시하면 눈멀고 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깨어진 꿈의 조각은 상처를 남기지만, 이뤄진 꿈의 무게는 우릴 질식하게 만듭니다. 그리스 신화 속 이카루스는 더 높이 날기를 꿈꾸었기에 추락했고, 벨레로폰은 페가수스를 타고 올림푸스로 가길 꿈꾸었기에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최후를 맞았지요. 인도 감독 부다뎁 다스굽타의 ‘레슬러’에서 결국 참극을 겪게 되는 우타라는 “꿈은 오히려 삶을 단축시킬 뿐”이란 삼촌 이야기를 전했던가요.


실현된 꿈은 결과적으로 더 이상 꿈이 없게 된 현실을 더 아프게 받아들이게 하는 요인일 수 있습니다. 성우가 어린 시절에 맹연습했던 송골매의 록음악 ‘세상만사’와 음악 따위엔 아무 관심 없이 끌어안고 춤추는 취객들을 위해 연주하는 심수봉의 트로트곡 ‘사랑 밖엔 난 몰라’ 사이보다 훨씬 더 먼 거리가 꿈의 안팎에 놓여 있는 지도 모르지요.


꿈을 꿀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이지만, 성취된 꿈은 수많은 ‘어떻게’의 질문을 연쇄적으로 양산하면서 결국 그 성취를 초라하게 만듭니다. ‘모든 한정(한정)은 부정(부정)”이라고 한 스피노자의 발언은 이제 막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정확히 들어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들은 꿈의 내용을 제한할 어떤 부수 조건도 생각지 않은 채 하나의 큰 덩어리로 꿈을 꾸지요. 창고에서 친구들과 연주에 몰두하던 10대 시절의 성우가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5주 연속 1위 하는 대히트곡을 3곡 이상 남기겠다”거나 “매달 적어도 200만원 이상을 벌어들일 수 있는 음악인이 되겠다”는 식으로 꿈꾸진 않았겠지요.


그 꿈은 그저 “음악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이뤄진 현실로서의 꿈은 이제 그 수많은 제한 조건들을 열어보이며 그를 좌절케 합니다. 꿈에 포함될 수 없는 한정이 현실에는 너무도 많기 때문이지요. 꿈은 실험실 플라스크 속 진공 같아서 순수하지만, 그 꿈은 현실이란 대기와 만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오염되게 마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뤄지기 어려운 꿈을 꾸는 이유는, 그리고 대개의 꿈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인간에게 눈 둘 곳을 남겨두게 하면서 권태에 직면하지 않게 예비하려는 섭리 덕분인지도 모릅니다.

이동진
http://cinema.chosun.com/site/data/html_dir/2001/12/02/200112020000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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