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onda,2013 |
중학교1학년 때 모 복지기관에 단체로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다. 자식에게 버려지거나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들이 계신 곳이었다. 그 때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있다면 봉사 시작 전에 학생들이 단체로 견학이나 하듯이 할머니들이 누워 계신 병실을 학급별로 돌아보는 것이었다. 무슨 구경거리나 난듯이 병실을 돌아보는데, 어린 마음인데도 그 때 왜 내가 지금 여기를 '구경'해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 화가 났던 것은 그 상황에서 우리는 이들을 '동정'해야한다는 식의 인솔자의 말. 그리고는 동정의 시선을 던지며 마치 동정으로 봉사는 끝났다고 생각한 뿌듯한 몇몇 학생들의 얼굴들이었다. 그 때 싸구려 동정은 지금 이 곳에 있구나 싶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때 말하고 싶었다. '동정은 dog에게나 줘'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안타까운 사연과 사람들이 있다. 근데 단순하게 그들을 도우면 되는 것인데 ,미디어는 동정이라는 고상한 단어 아래에 '나는 저 사람들보다 나아. 아 행복하다. 지금에 만족하며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품게한다. 그 때 말하고 싶다. '동정은 멍멍이에게나 줘'.
누가 누구를 동정한다는 것이 진정 순수한 의도의 감정일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일단 동정하는 이는 동정을 통해 묘한 안도감을 얻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 싸구려 동정은 제일 잔인하고 무식한 행위이다. 무엇보다 동정 받는 이는 동정을 원하지 않는다.
대학시절 소위 문제아들을 가르치는 봉사를 한 적이 있었다. 가정의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외로운 아이들이 많았다. 수업 중에 욕을하거나 자신의 머리를 벽에 박기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떤 아이는 뭐 그리 화가 났는지 수업시간에 나에게 끊임없이 욕을 해댔고 또 한 아이는 나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수업시간에 대놓고 딴짓을 했다.
봉사를 시작하기 전, 상처가 있는 아이들이니까 감싸고 이해해야한다는 나도 모르게 가졌던 싸구려 동정은 통하지 않았다. 애들과 함께 소리지르고 혼내기도하고 속이 썩기도했다. 그러다가 조금씩 조금씩 덜 소리지르고, 덜 욕하고, 좀 더 눈을 맞추는(나름의 발전이었다)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가졌던 싸구려 동정은 역시 멍멍이에게나 줘야할게 분명함을 느꼈다. 아이들에겐 분명 동정보다는 '공감'이 필요했다.
비단, 봉사라는 행위에서만이 아니다. 경쟁사회에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남이 잘되는 꼴 못보고, 나보다 잘 나가지 못한 사람에게서 위로로 포장된 안도감을 얻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그건 자신을 저렴하디 저렴한 인간으로 만드는 멍멍이도 거부할 동정심이다. 스스로 동정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 경계해야한다. 우리 세상에 더 많이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닌 공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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