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29, 2016

[책을 읽어보세] 욕망과 희망 사이에서_(모래의 여자_아베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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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코보_<모래의 여자>


  <모래의 여자>는 모래 해변으로 곤충 채집을 나섰다가 낯선 마을 사람들에게 납치당해 모래 구덩이에 갇혀버린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미 그곳에는 남편과 아이의 목숨을 모래에 빼앗긴 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햇볕이 채 들지도 않는 모래 구덩이에서는 끊임없이 모래를 퍼내야 최소한의 음식과 물을 공급받을 수 있다. 교사로서 평범한 삶을 지내던 주인공은 왜 자신이 이곳에 갇혔는지, 왜 끊임없이 모래를 퍼내야하는지 등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만 아무도 시원히 대답해 주지 않는다. 내내 불안과 분노, 좌절을 겪는 남자와는 달리 여인은 이 기괴한 생활을 지나치게 평범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심지어 그녀는 바깥세상으로 탈출을 성가신 일이라고 여기며, 모래 구덩이가 바깥사람들의 삶보다 나을 것이라 자부한다. 이 환경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했던 남자는 소설 후반부 ‘그것’의 발견으로, 그토록 기다려온 탈출을 목전에 앞두고 모래 구덩이에 안주하고 만다.

  고등학생 때 가장 한심해 보였던 어른들은 신문 한 자 읽지 않고 세상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저 돈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당시 내가 마주했던 어른들은 선생님들에 한정되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진보적으로 사회 문제에 열심히 나섰던 전교조 선생님들은 존경의 대상이었고, 사회 문제에 대해 숨죽이며 수업만 강요하는 보수 성향의 선생님들에게는 이유 없는 반항심이 생겼다. 미군 장갑차에 목숨을 잃은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 사는 애먼 사촌동생에게 SOFA 협정 개정을 고하는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언젠가는 전교조 소속이었던 동아리 담당 선생님이 경찰서에 소환되어 그 후 며칠간 자습만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날은 당장이라도 혈서를 써내려 갈 듯 한 기세로 대학생이 되면 가장 먼저 세상의 부조리함을 바꾸겠다고 굳게 다짐하던 날이었다.


  하지만 대학 입학 직후 독립투사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고 마냥 놀다 정신 차리고 보니 학점을 관리해야했고 취업을 위해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학교 로비 앞에서 성희롱 교수 퇴진을 외치는 사회학과 운동권 선배가 깃발을 흔들 때, 그 옆에서 조용히 음료수를 뽑아 서명장에 이름을 갈기고 강의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명 하나로 면죄부를 얻은 것 같았지만 이내 부끄러움이 몰려와 어릴 적 나의 모습은 지나치게 순수했음을, 아직 세상을 몰랐던 호기로운 나이였다고 치부하며 화끈 거리는 얼굴을 재빨리 지워냈다.

  시종일관 어둡고 비관적인 소설 후반부에 남자가 ‘그것’을 발견한 순간은 소설 전체에서 주인공이 유일하게 희열을 느끼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의 발견으로 인해 결국 그토록 갈망하던 모래 구덩이에서 탈출을 목전에 뒀음에도 남자가 혐오하던 현실에 스스로 주저앉고 만다. 주인공에게 ‘그것’의 발견은 부정하던 현실에서 우연히 찾은 욕망이 현실을 인정하고 살아가게 만드는 희망으로 다가왔으리라.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죽도록 벗어나고자하는 현실에서 우연히 생겨나는 사소한 욕망들이 모여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내일을 살아가게 한다. 그간 마냥 긍정적으로 불리는 희망이라는 단어는 아이러니하게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일종의 마취제 역할이기도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동료의 별명인 뫼비우스의 띠처럼 우리가 닥친 현실이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희망 역시 비관과 낙관을 하나의 모습으로 담고 있는 셈이다.

  가장 닮고 싶지 않았던 어른의 모습과 지금 나는 닮은 점이 많다.  고등학생이던 내가 지금 나를 발견한다면 맹렬히 비난을 쏟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그 때의 나에게 할 수 있는 변명은 이전처럼 ‘네가 어리고 순수해서 잘 몰랐던 거야’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하루 빨리 탈출하고 싶지만, 이곳에서도 내일을 살게 하는 욕망들이 눈앞에 펼쳐지더라.’ 일 것이다. 처음에는 차마 희망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사소한 욕망들이 모여 <모래의 여자> 주인공이 그랬듯 희망이라는 이름 아래 현실에 순응하는 삶도 있음을 말해 줄 것이다.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삶의 옳고 그름은 구분되고 판단될 수 없음을, 발버둥 치다가 주저앉고 그래도 다시 희망을 품어 보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이 곳이라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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