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ugust 26, 2017

시로 쓴 영화를 만나다 (이창동 감독_<시>를 보고나서)




“시를 쓰신다고요?” 

운전하던 남자는 마치 정신 나간 사람을 본 것처럼 미자를 쳐다본다. 그에게 ‘시’는 현실 감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할머니의 희귀한 취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미자가 마주한 현실은 남자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치부한 ‘시’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인 일들 투성이였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이 없는 손자, 가난에 불쑥 찾아온 합의금 독촉, 돈 앞에서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너뜨린 여자로서의 선택 그리고 손자 대신 감당해야 하는 죄책감까지. 미자를 둘러싼 현실은 잔인하게도 도망칠 자그마한 틈새 없이 철저히 막혀 있었다. 사방이 막힌 현실에서 그녀에게 시를 떠올린다는 것은 비정한 일상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움을 찾는 시간이었다. 

영화에서 시 창작 강의를 수강하는 사람들이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웃음과 눈물을 짓는다. 숨 막힌 현실에서 어릴 적 언니와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던 미자의 얼굴에도 삶의 고달픔이 잠시 멎은 듯 이내 눈물이 번졌다. 인간은 과거를 미화하기도 하지만 미화한 과거로 현재의 아픔을 잊기도 한다. 오갈 데 없이 사방이 막혔다고 생각이 될 때 이따금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당시엔 그렇게까지 좋았던 순간이 아니었음에도 그 기억은 지금의 고통을 멈추게 하는 진통제 역할을 한다. 언젠가 아무도 없는 온천 탕에 몸을 담그고 새벽녘 창 밖의 바다를 바라본 적이 있다. 그 순간 무엇 하나 놓칠까 싶어 눈과 머리로 사진을 찍어댔다. 숨이 막힐 때마다 떠올리면 좋을 순간들을 의식적으로 저장해 두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영화에 등장한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를 쓰기 위해 사소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던 미자는 그녀 앞에 닥친 일상의 잔인함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필사적으로 좇기 시작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피해자의 외모를 언급하는 가해자의 아버지, 피해자 어머니를 둘러싸고 앉아 거짓 웃음을 흘리는 사람들, 사건을 덮기에 혈안이 된 학교. 미자는 비현실적인 상황들이 보통 사람들에 의해 당연한 듯 저질러지는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그 자리를 떠서 식당 앞에 핀 꽃을 바라보고, 땅 위에 떨어진 살구를 살피며 시상을 떠올렸다. 합의를 위해 피해자의 어머니를 설득하러 갔다가 엉뚱한 얘기만을 늘어 놓은 뒤 돌아오는 버스 안, 미자에게 시와 치매는 차라리 참담한 현실을 잊게 만드는 마취제 같아 보였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을까요?” 

영화가 전개되는 동안 미자는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는지를 여러 차례 묻는다. 이 물음이 말 그대로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고민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손자의 죄를 대신 속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절실한 물음처럼 느껴졌다. 죄로부터의 도피처였던 시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죄 가진 인간 본연의 모습을 마주한 셈이다. 미자는 사건이 일어 났던 과학실을 들렀고 피해자가 서 있었던 다리 위를 건넜으며 강가에 앉아 하염없이 비를 맞았다. 그녀가 생각했던 가장 순수한 매개인 시를 통해 미자만의 방식으로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했다. 결국 어렵게 쓰여진 주인공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는 피해자를 향한 용서의 간청 그리고 위로를 담고 있었다. 만약 우리 일상의 언어로 용서와 위로를 전했다면 미자의 진심은 자칫 경솔하고 가볍게 다가왔으리라. 태초의 아름다움과 세상의 순수함을 담은 시만이 속죄를 표현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 전도연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러 갔지만, 하느님에게 이미 자신의 죄를 용서 받았다고 말하는 가해자 앞에서 주저 안고 만다. <시>에서 윤정희는 죄 앞에서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피해자의 사진을 보고도 뻔뻔하게 밥을 먹는 손자 앞에서 고개를 떨군다. 죄를 저지른 가해자와 죄 안에서 평생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피해자 두 쪽 모두 죄 앞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전도연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손자의 죄를 짊어져야 했던 윤정희, 삶이 부여한 좌절과 고통이 둘 중 누구에게 더 크게 다가왔을까. 이창동 감독은 영화로 시를 쓰는 사람이다. 시처럼 전개되는 그의 영화에서 감독은 신과 인간 앞에서 죄와 용서에 대한 메시지를 끊임 없이 던지며 과연 인간은 죄 앞에서 용서 받을 수 있는 존재인지, 용서 받을 수 있다면 과연 누구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구할 수 있는지를 조용히 관객에게 묻고 있었다.




Monday, August 14, 2017

[책을 읽어보세] 호의적 무관심을 위해 (조효제 교수의 인권오디세이_조효제)




  의정부행 만원 지하철에 한 남자가 탄다. 찰나지만 사람들의 눈은 일제히 피부색이 까만 그의 얼굴을 향하고, 몇 정거장 지나서 옆에 있던 한 사람은 코를 막으며 옆 칸으로 자리를 옮긴다. 지하철이 만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앉은 옆 좌석은 두 세정거장이 지나서야 겨우 채워졌다. 텔레비전에서는 추석맞이 외국인 장기자랑과 베트남에서 시집 온 며느리의 기구한 사연이 눈물샘을 자극하고 직접 만든 김치를 시어머니 입에 넣어 주면서 해피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매년 다문화 가정의 비율이 점차 증가하고 있음에도 이주민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아직까지 순혈주의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고, 미디어가 다루고 있는 다문화 사회의 갈등 해소 방식은 지나치게 단편적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계에서 IS에 의해 자행되는 테러가 급증하면서 이주민은 점차 냉담을 넘어 두려움과 추방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사회가 이주민 인권을 대하는 자세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국내 난민 문제이다. 현재 한국의 난민 심사는 외무부가 아닌 법무부 출입국 관리소가 관할하고 있다. 난민인권센터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1994년부터 2015년까지 난민 신청인 1만 5,250명 중에 단 576명만 국내에서 난민 인정을 받았으며, 난민 인정 비율은 5% 미만으로 OECD 국가 중 최하위 성적이다. 프랑스의 난민이었던 홍세화 선생은 난민 인권을 외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단순히 법적인 기준으로 재단하는 국내 난민 인권 현실을 지적한다. 특히 공항의 송환 대기실의 여건은 난민 인권 문제로 여러 차례 지적되어 왔다. 난민 자격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공항에 입국 후 바로 난민 신청을 할 수 있지만, 심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무기한 공항 내에 있는 송환 대기실에서 지내야한다. 송환 대기실은 국가가 아닌 민간 항공사의 비용으로 운영되고 있어 그 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이미 최대 수용인원(25~30명)을 초과한 공간에서 100여명이 기본적인 잠자리나 세면 시설을 이용하지 못한 채 하루 두 끼 제공되는  치킨 버거와 콜라로 끼니를 때워야 한다. 당연히 임산부와 어린이를 위한 시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난민 인권 문제와 이주민 차별에 대해 시급히 고민해야하는 시점에 서있다. 특히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또래 집단에서 겪는 소외가 그 중 하나이다. 이는 단순히 또래 사이의 인종 차별 문제로 접근하기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인권 존중이라는 개념을 갖추고 있느냐라는 관점으로 다가가야 한다. 인권에 대한 청소년들의 인식 형성은 어른들의 몫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시도는 쉽게 좌파적인 성향으로 치부되는 까닭에, 전 세대를 아울러 사실상 정규 교육 과정에서 '인권'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교육 받은 세대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인권 교육과 이주민 정책의 역사가 깊은 유럽에서도 지속적으로 난민 출신의 범죄자가 양산되는 이유는 그들이 어릴 적 겪은 소외와 빈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해서였다. 우리나라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성장하며 한국 사회와 마주할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소외와 차별을 줄일 수 있는 어린이, 청소년 대상 인권 교육 도입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한 인권 강의에서 조효제 교수는 이주민에게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되 그들을 차별하거나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저 나와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임을 최소한으로 인식하는 ‘호의적 무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효제 교수의 인권오디세이>에서 언급된 인권 관련 사례들이 시사하는 바를 한국사회에 접목 시키기에는 다소 추상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인권이라는 추상적인 주제를 계속해서 수면 위로 끌어 올려야 하는 이유는 다음 세대에게 지금보다 좀 더 인간답게 살만한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이다. 그 성과는 지금 당장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 곳곳에서 수백 년간 인권으로 끊임없이 연대한 앞선 세대의 움직임이 있었기에 지금 나는 그 시대보다 조금 더 살만한 땅 위에 서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