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2, 2016

[책을 읽어보세] 인간은 공간을 꿈꾼다 (비밀기지 만들기_오가타 다카히로)

비밀기지 만들기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비밀기지 만들기_오가타 다카히로>

  부산의 한 청소년 복지 시설인 '수국마을'은 수십 년 동안 사용한 복도식 낡은 기숙사를 허물고, 아늑한 마을 형태를 갖춘 청소년 거주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건축가는 아이들과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생활공간에 무엇을 원하는지 조사했고, 오랜 단체 생활에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개인 공간’임을 알아냈다. 다수의 인원이 한 방을 사용해 사실상 개인 공간이 없었던 과거 시설과 달리, 제한적인 면적을 최대한 활용해 소수의 인원이 한 방을 사용하도록 했고, 건물 내부에는 언제든 들어가 혼자 책을 보거나 생각에 잠길 수 있는 비밀기지 같은 작은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선 후 그간 공동생활만 해왔던 청소년들에게 수국마을은 ‘나와 우리의 공간’으로 다가왔다. 고향이 없는 청소년들은 시설을 나와 사회로 자립한 후 이곳을 나의 추억이 머무는 '내 방, 내 고향'으로 떠올리기 시작했다. 통제만을 강요하는 단체 공간이 아닌, 공동생활 공간과 개인 공간의 조화를 통해 공간의 힘으로 공동체 속에서 개인의 진정한 자립을 이루어낸 사례였다.


  인간의 소유욕은 사회적 관계나 물질적인 것들에 다양하게 적용되지만 그 중 가장 본능적인 소유욕은 바로 ‘공간’에 대한 욕구이다. 공간을 소유하고자하는 인간적 욕구는 처음 어머니의 자궁에서에서 느꼈던 편안함을 재현하고자하는 우리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갓 기어 다니기 시작하는 아기들은 커튼 뒤, 테이블 밑, 이불 속으로 시시 때때로 숨어 들어가고, 이 시기 아기들에게 눈에 띄는 후미진 공간은 가장 좋은 놀이터이다. 누구나 어릴 적 한 번쯤은 어른들에게 들킬지언정 비밀기지를 만들어 봤거나 완벽한 비밀기지에 대한 상상을 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시골 할머니 댁의 이불 방이 그러한 공간이었다. 그 어둡고 비좁던 공간에 들어가 낮잠을 자기도하고, 같이 놀러온 동생들과 몰래 어른들의 그림 맞추기 놀이를 하곤 했다. 작은 이불 방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편안함'이 좋았다.


  <비밀기지 만들기>는 방, 도시, 건물, 자연, 폐허에서 사물들을 활용해 말 그대로 '비밀기지'를 만드는 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실제 조사를 통해 어른들이 어릴 적 만들었던 비밀기지 사례와 저자가 추천하는 비밀기지 설계도까지 세세히 수록해 두었다. 다양한 비밀기지의 유형과 제작 시 주의할 점을 사뭇 진지한 문체와 그림으로 서술하여 웃음을 자아낸다. 저자 오가타 다카히로는 '일본기지학회'라는 다소 흥미로운 이름의 학회에서 활동하며 여러 비밀기지 사례를 조사하고, 아이들을 위한 비밀기지 만들기를 실행에 옮기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는 아이들이 생애 처음 비밀기지를 만들며 위험과 마주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장과정에서 필요한 용기와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비밀기지를 포함한 공간이라는 개념은 정서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 사회에서서 공간은 집이라는 개념에 국한되어 있다. 이 또한 정서적 가치로서 주거 공간보다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거나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오래된 공간이 품고 있는 시간과 기억은 배제된 채 무자비한 현대식 개발이 계속되고, 어느새 대다수의 사람들의 인생 목표가 되어버린 내 집 마련은 경제논리와 뒤엉켜 목적 없는 욕망이 되어버렸다. 또한 경제적 관점으로 구획되어진 생계 공간의 부족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쪽방촌과 고시촌을 양산했다. 공간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공간을 위해 존재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비밀기지에 대한 향수를 일으키는 이 책이 즐겁게 느껴졌던 이유는 현실에서 실현하기 힘든 어릴 적 상상들을 책을 통해 마주할 수 있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