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자 여행> 정여울 |
퇴사 직후 배낭 하나 매고 한 달간 홀로 터키와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 대부분의 여행 에세이에서 교훈처럼 말하듯 여행에서 자아 성찰이 모든 고민에 대한 해답을 내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허세 섞인 기대와는 달리 여행지에서 가장 많이 떠올렸던 주제는 "배가 고프다, 오늘 뭐 먹지"라는 생각 뿐이었다. 애초에 기대했던 자아와 진로에 대한 고민은 지나가는 강아지가 대신 해줄 법했다.
배고픔과 추위 같은 원초적인 욕구가 이따금 지나가고 나면 뜬금없는 외로움이 밀려왔다. 평소 혼자 하는 여행을 즐겼지만 여행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여행지에서 처음으로 '쓸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입에 거미줄을 치다가 식사 주문을 위해 처음 입을 뗀 순간, 마치 태초에 말을 처음 시작한 사람처럼 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일찌감치 자아 성찰이라는 목표는 던져버리고 숙소를 나와 매일 무작정 걸어 보기로 했다.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다양했다. 자칭 이스탄불의 에미넴이라던 전직 터키 래퍼는 (신빙성은 없다) 갑작스레 아기가 생겨 도심에서 10시간 떨어진 시골 마을에서 생계를 위해 아이스크림 장사를 시작했다며 해맑게 딸 사진을 보여줬다. 그의 말이 어디부터 진실인지 모르겠지만 거짓이면 또 어떠하리라는 생각으로 아이스크림을 퍼 올리며 뜬금없이 읊조리는 그의 속사포 랩에 한참을 웃어 댔다.
어느 날은 터키의 한 시골 옷 가게에서 손수 옷을 만들어 파는 70대 할머니를 만났다. 그녀의 딸은 이스탄불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었고, 딸의 목숨을 앗아간 도시가 싫어 아무 연고가 없는 시골 마을에 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만약 딸이 살아 있었다면 나와 같은 또래였다며 갑작스레 눈물이 차오른 얼굴을 떨군 채 괜스레 앞에 있는 재봉틀을 돌렸다. 외로움과 그리움, 삶의 회한이 가득한 눈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이 맑았지만 슬퍼 보였다. 가게 문을 나설 때 내 손을 잡으며 직접 그린 알록달록한 인어공주 그림 하나를 건넸다. 그 순간 마지막 인사로 그녀를 꼬옥 안으며 나의 체온이라도 당신의 가슴에 위로로 전해지길 바랐다.
이따금 현지인들의 순수한 호의를 의심부터 하고 보는 모습에, 그간 스스로 깨닫지 못하던 딱딱한 고정관념과 마주하기도 했다. 늦은 밤 숙소에 도착한 나를 위해 숙소 주인이 멀리서 샌드위치를 사온 적이 있었는데, 고마움보다는 약을 탄 것이 아닌지 한참을 망설이다 빵을 베어 물었다. (의심이 무색하게 꿀맛이었다) 뒤늦게라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엇갈려 다시 마주치지 못하고 떠난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사람을 피해 혼자 있고 싶어 떠난 타국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사람에게서 다시 따뜻함을 얻고 나 또한 그들에게 위로를 건넸다. 길에서 마주한 낯선 사람들의 일상이 소중하게 느껴진 만큼, 그저 달아나고만 싶던 한국의 내 일상도 문득 소중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국 이 여행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거창한 답은 얻지 못했다. (사실 기대하지도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고민은 제자리였고 해답 역시 없었다. 다만 한 달간 타인의 삶을 여행하며 자아에 대한 고민은 스스로에 갇혀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갇혀 있는 나를 낯선 타인에게서 비춰볼 때에만 가능한 것임을 알았다. 정여울씨는 <그림자 여행>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여행에 대한 이야기보다 평범한 일상에서 느낀 감상을 인상적인 영화, 책 내용과 함께 엮어 풀어내고 있다. 사실 저자의 대표작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에서 느낀 감동보다 여운은 미미했지만 쉬운 문체로 쓰인 담담한 글은 작가의 일상을 편안히 여행하기에 충분했다. 책장을 덮고 여행 에세이가 아닌 이 책의 제목을 <그림자 여행>이라 지었는지 의문이 생겼다. 저자가 생각하는 여행은 어딘가를 떠나야만 하는 공간적 의미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타인의 그림자를 밟아가며 나의 삶을 반추하는 과정 그 자체이기에 이러한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